김지영 씨의 아버지는 사 형제 중 셋째인데 첫째 형은 결혼도[1] 하기 전에 교통사고로[2] 죽었고, 둘째 형네[3] 가족은 일찌감치[4] 미국으로 이민 가 자리를 잡았다[5]. 막내와는[6] 유산 분배와 노모 부양 문제로 크게 싸우고 의절해[7] 왕래를 안 하고 있다.
金智英的父亲在四兄弟中排行老三,大哥在婚前死于车祸,二哥很早就成了家,带着一家人移民美国生活,最小的弟弟则因为遗产分配及高龄父母的赡养问题,与金智英的父亲大吵过一架,两人从此不再往来。
형제들이 태어나고 자라던 시절은 살아남[8]기도[9] 힘에 부치[10]던 때였다. 전쟁으로, 병으로, 굶주림[11]으로 노소를 가리지 않고[12] 죽어 나가는 와중에[13] 고순분 여사는 남의 농사를 지어 주[14]고, 남의 장사를 팔아 주고, 남의 집 살림[15]을 살아 주고, 또 본인 살림까지 알뜰살뜰[16] 꾸려[17] 가며 악착같이[18] 사 형제를 건사[19]했다. 열굴이 하얗고 손이 고운 할아버지는 평생 흙 한 줌[20] 쥐어 보지 않았다. 가족을 부양할 능력과 의지가 전혀 없는 사람이었다. 그래도 할머니는 할아버지를 원망[21]하지 않았다. 계집질[22] 안 하고, 마누라 때리지 않은 게 어디냐고, 그 정도면 괜찮은 남편이었다고 진심으로 생각했다. 그렇게 키워 낸[23] 아들들 중 결국 자식 노릇[24]을 하는 건 김지영 씨의 아버지뿐[25]이었는데, 할머니는 자신의 허망[26]하고 비참한 처지를 이해할 수 없는 논리로 위안했다.
金智英的父亲那一辈,许多人因为战争、疾病、饥饿而不幸丧命,能不能存活下来都是问题。而在那段岁月,奶奶不仅替人种田、做生意、做家务,就连自己家也打理得很好,咬牙苦撑,好不容易养大了四个儿子。而爷爷这辈子从未徒手抓过一把泥土,始终养尊处优,既没有养家的能力,也没有那份责任心。但是奶奶从未对爷爷有过任何怨言,她真心认为,丈夫只要不在外偷腥,不动手打妻子,就已经是不可多得的好男人。然而,如此辛苦地一手带大的四个儿子,最终只有金智英的父亲善尽儿子的本分。奶奶则用一套令人难以理解的谬论,安慰晚年如此悲惨不堪的自己。
参考